-해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청춘에 발을 들인 것이라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망할 여름. 비나 실컷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야속하게도 하늘은 태양빛만 강하게 내리 쬘 뿐이다. 짜증이 하늘을 한참이나 뚫을 만큼 상승하고도 남은 정공룡은 제 옆에서 부채 두 개를 한꺼번에 쥐고 있는 김각별을 바라보았다. 그마저도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지 각별은 애타게 팔락이던 부채질을 멈췄다. 그들은 지옥의 수험생, 그러니까 고3이다. 웹툰이나 드라마, 소설에 나오는 낭만적이고 청량한 고3의 여름은 작위적이고 현실성 따위는 갖다 버린 환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 걸 보통 청춘이라고 하던가, 정작 현실의 청춘은 이렇게 하루의 반 이상을 학업에 쏟아부으면서 낭만 같은 건 하나도 없던데. 사실 잘 알고 있다. 청춘의 뜻은 그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사람들,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걸. 그럼에도 공룡은 그들의 청춘에 불만을 토로했다. 전혀 밝지 않다, 찬란하지 않다.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사랑이 싹트는 것도 아니다. 이게 만화라면, 저들은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엑스트라 또한, 각자의 삶을. 비록 일회성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공룡
-응?
-아니다
-사람을 빡치게 하는 법이 뭔 줄 알아 각별님?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는 거리는 살이 녹아내릴 듯한 뙤약볓 아래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 아, 물론 그들 또한. 더럽게 덥네, 각별은 나무 막대기를 한 손에 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부채로 햇빛을 가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다가 떠오른다. 시원하고, 맑고, 푸르고, 흰 거품을 만들어내는 파도가 들이치는 바다. 하지만 지금, 무작정 공룡을 끌고 바다가 있는 지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간 그에게 미쳤나며 등짝을 맞을 게 뻔했다. 만일 천재지변이 일어나 공룡이 바다에 같이 가는 것에 응한다면. 바다에 가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저 바다를 보고 오는 건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늘어졌다. 입을 작게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고민하기도 수 차례. 고맙게도 공룡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제 뭐 할거야?
각별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2시, 바다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바다..
고민이라도 하는 듯 그는 뜸을 들였다.
-가자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각별을 공룡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미쳤냐는 말을 몸으로 말해요와 같은 게임도 아니고 얼굴로 말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각별은 그때 깨달았다. 그가 뭐라 말을 덧붙여 공룡을 설득하려고 하기도 전에, 공룡이 먼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뭐.. 한번 가보자
안 그래도 마침 공룡은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빛에 지칠 대로 지쳐 각별이 나름대로 시원한 곳을 추천해 주길 바라며 말을 걸었던 것이기에-그 추천이 바다일 줄은 미처 몰랐지만-한껏 신이 난 채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각별의 뒤를 말 없이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걸어 역에 도착했다. 역까지의 거리는 고작 15분이었지만 각별이 길치인지라 길을 뱅 돌아서 온 것을 제외하면 인생 최대의 일탈이자 추억이 될 무언가였다. 역 안은 예상대로 쾌적했고, 곧 타게 될 지하철도 시원하겠거니 하며 개찰구를 지나 바다로 향하는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자리에 앉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맣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은 출발하고, 분명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일정한 무늬들이 빠르게 지나갈 뿐이다. 언제쯤이면 지상에 올라갈까. 멍하니 빠르게 반복되는 패턴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점점 지하철의 자리가 채워진다. 제 옆자리에 있는 각별은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지하철 내에서도 그새 잠에 들었다. 들어왔다 나가며 지하철의 자리를 메우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어디에, 어디로, 어떻게. 이렇다 할 잡다한 생각들을 하며 흘려보내는 시간들은 무의미하게 지하철과 터널 그 벽 사이로 깔려 흩어졌다.
지하철이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덧 시각은 4시, 슬슬 태양이 저물어들 시각이었다. 물론 한여름인지라 태양은 아직도 쨍하지만 아까 걸었던 거리에 비교하면 찬찬히 기온이 떨어질 때 아닌가. 이제 도착할 때가 되어 공룡은 각별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곤 갑갑했던 지하철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은은하게 배어있는 바다의 짠 내음과 섞여있는 약간의 바닷비린내가 코를 간지럽혔고 각별은 핸드폰을 꺼내 남아있는 배터리를 확인했다. 공룡은 꺼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더욱 더 깊이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각별님 그거 몇 퍼 남았어?
-23, 별로 안 남았어
-후딱 바다만 보고 가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한 해변가였다. 가끔 하얀 조개껍데기가 찰그락거리며 발에 밟혔다. 모래사장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햇빛을 반사해 금빛으로 어여쁘게 반짝거리는 윤슬과 하늘을 꼭 닮은 수면이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두 눈에 가득 담긴다. 약간의 노을빛이 스며든 푸른 하늘도, 새하얀 구름도, 에메랄드빛 바다도. 모두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적이고 청량한 청춘에 걸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와 하늘 그 사이에 서 있다.그렇게 그들은 청춘 앞에 발을 딛고 있다. 자유를 앞에 두고, 바닷가에 서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어떤 말조차 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들은 청춘의 코 앞에 서 있다. 파도가 모래와 작은 돌멩이, 깨져버린 조개껍데기를 쓸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곤 이따금씩 약간의 대화를 나누면서.
-하여,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상상하는, 생각하는. 바라는 '청춘'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그들은 다시 개찰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푸른색이 가득했던 두 눈에는 다시 칙칙한 은회색이 담겼다. 조금씩 덜컹이는 익숙한 지하철을 타고새로움의 끝을 지나 다시 단조로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언제든, 어디든, 자유와 청춘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이제 그들은 알고 있으니까. 어린 날 가득히 품었던 순수함이 다시 제 빛을 찾으면, 그것이 곧 청춘이라는 걸.
홍채에 스며든 햇살이 오랜만에 금빛으로 빛났다.
Epilogue
-각별님. 청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환상이지
-나도 그런데, 지금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아
-..그래?
해밝은 웃음을 그리는 공룡을 끝으로 고요함이 이어졌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뱃고동 소리, 갈매기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제외하면 정말이지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침묵이다. 춤을 추듯 울렁이는 물결에 맞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고 있다.
-우리 가끔 오자, 숨 돌리고 싶으면 그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생 처음으로, 청춘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순간이었다. 공룡과 각별이 지나간 자리에는 발자국이 옅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