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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각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그를 맞이하고 그는 나를 웃으며 맞이했다. 나에게 공룡은 그런 친구였다. 나를 웃으며 맞이하는 것이 일상이던... 그런 공룡 덕분에 내 세상은 바뀔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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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기 전, 내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아무 색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었다. 나조차도 색을 잃어버리고 흑백으로 가득한 세상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다.
처음엔 바꿔보려 했다. 내 눈에 색이 보이던 시절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의 주인공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중, 어느 날 눈을 뜨니 색이 없어진 상태였다. 주인공은 이를 깨닫고 펑펑 울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봤지만 돌아오는 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뿐이었다. 그는 좌절하고 절망했다. 색을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결국 하나씩 찾아가다가 엔딩엔 다시 돌아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 책에서 주인공은 삶에 흥미가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을 사는 인물이었다. 색이 사라져 보였던 이유도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책의 주인공처럼 나도 흥미를 가지게 되면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던 시기였다.
결국 나는 공부를 했다. 공부에라도 '흥미'를 가진다면 색이 다시 생길 것 같아서. 그러나 공부에 열중할수록 색이 사라지는 현상은 더욱 빨라졌다.
다음날, 일어나보면 분명 색이 있던 물건이 무채색으로 변했다. 그렇게 물건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 고이 간직하였다. 희망을 품던 시기가 지나가고 나도 모르는 새에 체념했던 것 같다. 색이 있었던 적도, 있을 일도, 다시 생길 일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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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란걸 잊은 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지만 내 시선은 멈춰있었다. 다양한 색이 존재하고, 따스함 그리고 서늘함처럼 감정까지 존재하던 그때가 아직 내 눈엔 선명했다.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명도만이 가득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나마 그때를 보고 있다. 머릿속에서 바라보는 그 세상은 아직 선명했다.
세상의 이치를 따르듯 익숙해져 갔고 눈치 없이 시간은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남들처럼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장소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장소에 갈 때, 잊었던 희망을 다시 품고는 했다. 나의 외침을 누군가는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것이 기나긴 꿈이었으면... 차라리 책에서의 주인공처럼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다시 돌아와 있기를..
'제발... 나도 색을 보고 싶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들어섰을 때, 두근거림을 느끼고 싶다고. 모든 게 똑같아 보이는 세상은 이제... 지겨워. 편안하고 따스한 그때로 돌아가 나를 사랑하고 안아주고 싶어. 그러니... 나에게 다시 색을 돌려줘.'
이러한 기도를 몇번이나 했을까... 체념한 줄 알았던 나는 새로움에 다시 희망을 품고는 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다시 체념했다. 이런 일들을 반복되는 일상에 생기는 희망은 멀리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었다. 고등학교에 가는 첫날에도 수없이 외쳤다.
'누군가는 들어주길 바라며 외쳐봐... 나에게 또다시 새로움이 찾아왔어. 또다시 희망을 품는 게 바보 같지만 혹시 모르잖아. 누군가가 내 외침을 듣고 들어주실지 모르잖아.'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는 밤이 지나가고 고등학생으로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새로움이 찾아오는 첫날이기에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렇게 그저 지나가는 하루가 쌓여갔다.
'고등학생'이라는 지위는 나에게 새로움이 아니었다. 그저 중학생의 마지막 날에서 몇시간 지난... 그런 날이었을 뿐이었다. 또다시 반복되는 일에 희망을 한차례 잃고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보면 그나마 잡생각들은 나지 않았으니까. 희망이란 것도 꿀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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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시험 날이 찾아왔다. 시험을 보는 날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점검받을 뿐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겐 제일 떨리고도 힘든 날이 나에겐 아무렇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남들과 달랐다.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간 뒤, '성적표'라고 적힌 종이 한장을 받았다. 남들은 이 종이 한장에 좌절하고 기뻐할 것이다. 난... 아무렇지 않았어야 했다.
바뀌지 않는 것이 단조로움과 편안함이라는 장점이 있다던데 그런 것이 당연했던 나였는지 한순간에 '2'라는 숫자에 동요해버렸다. '1'라는 숫자에서 오는 단조로움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변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움을 바라던 나에게 온 선물이라 생각했다. 이후, 들려오는 소문을 따라가 보니 '공룡', 그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변화를 준 이였다.
나에게 항상 찾아와 익숙했던 것이 떠나버림으로써 변화해버렸기에 떠나버린 것을 얻게 된 자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러나 그 관심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를 직접 본 적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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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각별. 네가 각별이야? 공부 엄청 열심히 한다며. 꿈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냥 공부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넌 누군데 나한테 갑자기 와서 말을 걸어?"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이야기 안 했구나. 공룡이라고 해. 너한테 관심이 생겨서 직접 찾아왔어. 네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길래 이름을 부르면 돌아볼 줄 알고 호기심으로 찾아와서 부른 건데 불편했다면 미안해. 초면에 야라고 한 건 무례했다. 그리고 공부하던 걸 방해했으면 미안해."
"괜찮아. 그리고 사람과 이렇게 대화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 나야말로 날카롭게 대했다면 미안해. 그럴 생각은 없었어."
"음...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나갈래? 내가 사과의 의미로 너한테 꼭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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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와 달랐다. 잠시 생긴 관심을 외면하고 나에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단념했던 나와는 달리 그는 '관심'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보러왔다.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관심을 무시했던 나와 달리 관심이 생겨 직접 보고 싶었기에 인사를 건네는 그는 달랐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그가 나에게 뜬금없이 찾아와 인사와 함께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 것은. 그가 가자고 한 곳은 옥상이었다. 보통 고등학교는 옥상을 막아둔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를 든 순간, 노을 지고 있는 하늘에 매료됐다. 오랜만에 보는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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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여름에는 석식시간 끝나고, 겨울에는 야자 시작하기 전에 오면 이 풍경을 볼 수 있어."
"이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야?"
"세상 잃은 눈을 하고 있잖아. 나도 그랬던 적이 있거든. 무엇을 해도 의지가 없고 재미가 없어서 세상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 그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지금 너에게서 보였어. 나는 변화를 주고자 땅만 보던 내 시선을 하늘로 올렸어. 그렇게 하루는 하늘만 보며 그 변화를 바라봤어. 변화를 바라보며 해가 반쯤 사라졌을 때 보이는 노을이 가장 예쁘고 아름답다는 걸 알았어. 그 순간 나는 다시 붉게 타오르던 하늘처럼 의지가 타올랐어. 나처럼 네가 조금이나마 세상을 넓게 바라봤으면 하는... 오지랖이랄까? 나도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물론 네가 안쓰럽거나 눈에 띈 건 아니야. 그냥... 과거 내 모습이 보여서 바꿔주고 싶었어. 이 노을이 지는 풍경이 내가 주는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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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을 들은 순간 공룡의 모습을 비롯한 그 주변에 색이 더해지고 내가 바라보던 하늘은 어느새 색이 더해져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왔던 변화, 그때 느꼈던 감정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움츠러들었던 것이 다시 부풀어 오르듯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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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느꼈다. 누군가 내 외침을 들었다면 그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과거, 색이 모두 있던 그때로 돌아가야만 웃고 편안해질 줄 알았다. 편안해지면 나 자신을 안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오랜 외침을 내가 들으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웃고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준 변화를 매개체로 나 스스로가 이를 인정하니 색이 일부 돌아오지 않더라도 난 그를 향해 웃었다. 그러곤 내 마음속에 벅차오르던 감정은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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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각별. 넌 항상 여기에 올라오면 웃더라? 평소에도 그렇게 좀 웃어봐."
"평소에는 이것만큼 재밌는 게 없어서 그런 거야. 해가 저렇게 타오르는 것을 보면 너무 재밌고 흥미로워."
"그래? 내가 알려준 것이지만 정말 특별한 감상이네. 너다워. 그래도 평소에 그렇게 웃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너야말로 여기 오면 무표정이 되는 건데?"
"음... 이 노을을 볼 때면 그때가 생각나면서 다시... 의지를 불태우게 되거든. 의지를 다시 불태울 때면 웃기보단 비장한 얼굴을 하게 돼서 무표정인 것 같아."
"멋있네. 너는... 어떻게 계속 변화하려고 하냐? 두렵진 않아?"
"물론 두렵지. 그런데도 변화하면서 얻는 게 많거든. 너도 그걸 느끼는 날이 언젠가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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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말했던 날이 왔을지도 모른다. 너를 처음 알게 된 날, 변화를 느꼈고 이후에 너와 함께 옥상에 처음 올라간 날 변화에 편안함을 더했다. 나는 변화로부터 잃었던 색을 얻었고 하나 뿐인 친구를 얻었으며 나를 얻었다. 결론적으로 세상에 점차 색이 입혀지며 변했고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며 변했다. 앞으로 변화는 평소처럼 찾아올 테지만 무시하지 않고 편안함으로 포용할 것이다.
赤霞
적하(赤霞): 붉은 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