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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주의(가스라이팅, 사이비 등...)

* 내용이 전반적으로 우울합니다. 유의해주세요.

 

 

 

 

 

 

친애하는 나의 아버지에게.

 

 

 

우리는 예견된 죽음으로 갑니다.

 

 

 

 

 

아버지에게 이런 것을 쓰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습니다. 편지 같은 것은 헤어지는 이들이나 작성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서로 떨어지게 될 일이 없었을뿐더러, 애초부터 이런 글을 남길 만큼 그닥 돈독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의 일방적 증오에 가까운 관계이지요. 사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해왔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저 피가 섞인 신도라고만 생각했을까요. 뭐가 되었든지 간에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합니다. 그 어떤 가족도 이런 형태를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증오하는 동시에 떠나지 못하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신으로 만들려는 아버지라니.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도 믿지 않았을 법합니다. 기괴하고 일그러진. 꼭 우리를 닮은, 우리의 종교를 닮은 모습이지요.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을 즈음에 나는 이미 멀리 떠나가 있을 겁니다. 이것을 읽고 분노하실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 평생을 공들여온 것이 종교와 나인데, 그 중 하나가 은혜도 모르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야 나보다도 종교를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니까요. 아버지라면 분명 나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낼 겁니다. 물론 성에 차지는 않으시겠지만요. 당신을 완벽히 닮은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나와 아버지가 가장 잘 알고 있지요. 아버지는 대체품을 보며 나에 대한 분노를 곱씹을 것이고,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이곳에서의 기억들을 하나씩 되새기게 될 겁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편지를 찢지는 마세요. 명색이 하나뿐인 아들인데, 아들의 마지막 말은 남겨주는 게 부모로서의 도리 아닙니까. 부디 영원히 그 편지를 가지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나 역시 이곳에서의 기억을 영원히 지니고 살 것이므로. 혼자서만 과거를 기억하는 처지는 꽤 외롭지 않나요? 사실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딱히 잊으려 들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쌓아온 업보가 산더미와도 같은데, 나 하나 편하자고 이 모든 것을 잊고 지낸다니. 더는 그렇게 이기적이게 살지 않으렵니다. 모든 내 죄악을 받아들이고 평생을 속죄하며 살려고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회개이기도 하고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요. 이 편지는 마치 일종의 회고록과도 같고 나는 그러한 것과 곧잘 친해지는 편이 아닌 탓에, 펜을 들어 글자 하나를 적는 것도 버겁습니다. 아마 일평생을 숨겨오리라 믿었던 걸 꺼내야 하기에 그렇겠죠. 그럼에도 이 편지는 끝까지 적어보려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최소한의 예는 다하고 가고 싶었으니까요. 아니면 그저 떠나기 전 내 죄에 대한 반성의 되새김이라거나. 어쩌면 정이 들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지긋지긋한 곳에도 정이 드는 걸 보면, 사람은 사랑과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던 아버지의 말씀도 어쩌면 옳은 것인지도 몰라요. 아니면 내가 그저 세뇌당한 것일 수도 있고요.

어릴 때로 돌아가 봅시다. 잊을 법도 합니다만 나는 그때의 기억을 현재에서도 끌어안고 있습니다. 세뇌와 비슷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까요. 나는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신이 되라며 종용하는 아버지의 그 말씀을 말이에요. 나와 같은 색의 샛노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붙잡고 그리 말씀하셨죠. 나는... 모르겠습니다. 왜 싫다며 고개를 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나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거부감뿐이었습니다. 신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며 떠듬떠듬 핑계를 읊었지만 아버지는 잔뜩 떨리고 있는 내 몸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내가 그 자리를 거부한 이유가 어떠한 신앙심에 의거한 것이 아닌, 그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도요. 아버지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으셨었죠.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어요. 그러더니 대뜸 나에게 타협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신의 대리인을 뽑으라고 하셨죠. 이왕이면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로요. 대체 머리와 신앙심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 물음에 아버지는 그저 나의 편의를 위해서라며 넘겨버렸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연관성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 그만큼 나는 어렸고, 아버지가 무서웠으니까요. 그렇기에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 친해지고, 3달마다 아버지께 그 중 한 명을 바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들을 선별해내고... 살아남기 위함이었으나 그딴 말만으로는 정당방위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해온 모든 생각은... 날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요. 나는 충분히 거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어요. 설령 그것이 내 목숨을 앗아갈지라도 말입니다. 아니, 아버지는 아마 날 죽이지 않았겠지요. 죽기 전까지 나를 때리거나 달콤한 말들로 나를 살살 꾀어낼망정 나를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야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했으니까요. 신이 아닌 목사가 되어 저들의 위에서 군림해야 했으니까요. 아, 어쩌면 신이 되는 것도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자신은 물론이고 신도들까지도 모두 당신을 떠받들어 모시고 있잖아요. 피부에 선명히 느껴지는 고양감. 아마 그걸 나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나 보죠. 그렇기에 나를 엄하게 훈육할 뿐 포기하거나 내치지는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그 짓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런 엄두를 아예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항상 깊은 곳에 그런 생각을 숨겨두고 살았습니다. 반항이라던가, 분노라던가 하는.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게 하는 것. 그렇게만 했더라면, 최소한 그들을 죽이지 않을 수는 있었어요. 아니면 목숨을 더 연장한다든가.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그 하루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그럴 용기가 부족했고, 그럴 방법을 몰랐고, 빌어먹게도 그럴 힘조차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의 소중한 것들을 쉽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세력을 유지하셨지요. 현명한 자들은 사라지고 오직 맹목적인 이들만이 우리 곁을 맴돌았어요. 새로운 신도들이 들어오면 똑같은 형태의 숙청이 계속되었고요. 의심하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순진한 어린 양뿐이었습니다. 그야 당연하게도, 믿음이 견고하지 않은 자들이 눈에 보이노라면 내가 아버지에게 바쳐버렸으니까요. 그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기 전에 말이에요.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방패가 되었던 믿음을 깨버리는 것. 비로소 바깥 세계를 보고 꿈꾸게 하는 그것. 의심이라는 이름 하에 숨겨지는 진실. 이곳이 멀쩡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버지가 신도의 고혈을 빨아먹는다는 것쯤은 한참 전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저 종교의 유지라는 명목 하에 헌금을 걷는 거라며 자신을 위로하시겠지만, 그래 봤자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요. 언제부터 깨닫게 된 걸까요. 나이를 먹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이곳은 글러 먹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한참 전 말이라는 것을 제대로 내뱉기도 전에 본능과도 같은 감각으로 알아차렸을까요. 아니면 한참 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목사실에서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후였을까요. 

그 장면. 그날. 5년 전의 일이었던가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그쯤 될 겁니다. 아버지께서 한 신도를 내팽개치고 계셨었죠. 정 씨 아저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리 발악해도 닿지 않을 아우성. 그 아우성을 아저씨는 내지르고 있었어요. 그마저도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금세 멎어 들어갔지만요. 그때의 아저씨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버지께 들은 말이 퍽 충격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고요. 어떻게 됐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죠. 딱히 충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놀란 내색을 하지 않고. 아저씨에게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도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 아저씨. 나를 참 많이 챙겨줬었는데요. 다정하다고 할 순 없어도 최소 남들처럼 가식적이게 굴거나 날을 세우지는 않았었습니다. 나에게 사탕을 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도 남겼었지요. 그때 아저씨는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나더러 살려달라는 말을 사탕으로써 대신 전한 것일 수도 있고요. 어쨌거나 그것도 과거의 일이지만요. 이제 아저씨는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부름의 이유는 참으로 사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별 사소한 것을 죄 기억하는 나조차도 떠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니면 그때  아저씨의 표정이 내 생각보다도 확연히 기억에 새겨진 탓일 수도 있지요. 왜, 한 번 충격을 받으면 그때 본 다른 것들은 왜곡되거나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잖습니까.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 나는 아저씨가 준 사탕을 물고 있었습니다. 우두둑. 잿빛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을 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탕을 세게 물었어요. 날카로운 파편이 내 입안을 해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입안에서 비릿한 것이 느껴졌어요. 아니면 씁쓸하다거나. 어쨌거나 달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버틸 수가 없어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버지를 쳐다봤어요. 그런데도 그 아저씨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요. 나를 보는 그 눈. 선명하게 날이 선 감정. 나는 그 표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가 짓던 그 표정. 아버지께 사람들을 바칠 때 그들은 꼭 그런 표정을 지었거든요. 차마 대놓고 볼 수는 없었기에 자는 척 실눈을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자지 않는다는 것조차 모르는데도,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덥니다. 선명한 분노. 혹은 두려움. 그 속에서 느껴지는 배신감. 사무치는 감정들. 한마디 말조차 않았음에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날카롭게 나를 할퀴어 그런 날이면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나는 아프기 싫었습니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싫었고, 그들을 만난 것을 후회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어요.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발악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을 계속 무시해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어차피 죽게 될 사람들이라며 자신을 위로해보기도 했지요.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내가 이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말이에요. 최후의 것으로 치부하고 저 깊은 곳에 숨겨왔던 것. 그래요. 도망치는 것 말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종교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으로. 누군가가 소중해진 것을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졌어요. 아버지가 말한 천국이라는 곳이 실존한다면, 아마 그런 곳을 의미하겠지요. 나는 천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천국과 내 천국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할 테지만 말입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간격이 나를 부추겼습니다. 저 멀리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자고 내 뒤에서 누군가가 꼬드기는 것 같았어요. 선악과를 권하던 뱀의 목소리가 마치 그것과 같았을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유혹. 자유에 대한 갈망.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경한 그 감정들이 나를 살게 하덥니다. 그 순간 나는 태어나서 처음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죽기 싫다는 감정이 아닌, 진실로 삶을 갈망해본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어요. 이 감정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 공포. 생경함. 낯섦과 걱정.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아우르는 단어는, 모순적이게도 설렘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께 더 고분고분히 굴었습니다. 괜히 책잡혀서 좋을 게 없다는 마음으로요. 아마 아버지도 어느 순간부터 내가 당신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오랜 세월 동안 붙잡혀 살았고, 그렇기에 당신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 자신보다도 말입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런 나를 의심스레 여기셨지요. 그랬기에 몰래몰래 신도들을 시켜 날 감시하던 것이고요. 그러나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요. 아버지는 가끔 나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전까지 내가 아버지께 보였던 모습이라곤 죄 실망스러운 것뿐이었기 때문일 테지만요. 다만 나는 삶에 대해 갈망하기 시작했고, 그건 과거 나의 모습을 지우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야, 대충 저 앞의 커다란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기만 하면 쉽게 나가떨어지던걸요. 신과 함께할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는 교리 탓이었을까요. 아니면 신을 생각하던 내 모습이 독실해 보였던 탓일까요. 허옇고 좁은 기도실에는 이내 나 혼자만 남게 되고, 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도를 그린 후에는 밤중의 경비를 기록하고, 또 나에게 위협이 될 법한 사람들을 기록해두었어요. 그 종이는 내 성경책에 끼워두었고요. 그렇게 하면 그 누구도 뒤적거리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모든 건 순조로웠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상적인 아들을 연기했으며, 감시는 더더욱 줄어들어 이윽고 사라지게 되었어요. 대신 다른 종류의 눈길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어느 순간 나를 동경하는 이들이 늘어났어요. 내 신앙심은 죄다 거짓이고 그저 탈출을 위한 수단이었는데 말이에요. 그이들은 나를 곧잘 따르고 나를 각별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덕에 대리인을 바치는 일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음에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공백은 빠르게 채워지고, 사라진 자들은 곧 잊혔으니까요. 나는... 그저 그들을 잊은 척을 하면 되었습니다. 지겹도록 해온 것이 그런 종류의 것들인데, 내가 이를 망설일 리가 있나요. 난 도망쳐야 했고, 그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이 지긋지긋한 사이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게 위안을 해봐도 쏟아지는 죄책감을 감당할 방법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낮에는 탈출 계획을 세우고 밤에는 사무치는 감정들에 잠을 설쳤어요. 그 당시의 나는 무척이나 외로웠고 그럼에도 의지할 곳은 없었기에, 나를 붙잡으려는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또다시 쉽게 지치게 되었고, 날 살게 하던 것이 날 죽일 것만 같았어요. 사실은 조금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탈출 계획을 계속 세우던 것은 단순히 습관으로 새겨진 탓이었고, 내가 정말로 그걸 갈구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었으니까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어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끌려다니는 것밖에 없는. 뼈저리는 무력감. 아마 아버지는 그따위 것을 느껴본 적이 없겠지요. 내가 가진 무력감의 대부분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데도 말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생각해도 더 이상 설레지 않던 것이 그 증거였습니다. 가끔씩은 환청이 들리기도 했어요. 내가 져버린 그 사람들의 목소리로 나를 원망하더군요. 휙휙 바뀌는 목소리. 한 자 한 자가 귀에 새겨질 때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곤 합니다. 사실 내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모든 이들이 잊히지 않아서, 날 바라보던 눈빛이 끔찍하리만치 선명해서. 그들이 내 눈앞에 아른거리던 것은 단지 그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이루는 나의 업보들이 하나 둘 스쳐 가고, 어느새 처음으로 배신한 아이까지 나를 지나고 나면, 그 목소리는 어느새 나의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끔찍하게 익숙한, 아버지를 닮은 그 목소리로 나를 원망하덥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이상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감정은 비대해져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가고 곧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됩니다. 문득 토악질이 나왔어요. 참기가 어려워 그대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내 기억마저도 그곳에 버려둔 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지요. 고립된 곳. 일반 신도들과는 다른, 어둡고 외로운 나의 방. 아버지와 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내 성경책을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끼워진 종이를 들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던 그 애. 이미 모든 걸 읽은 표정을 하던 그 애.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그 애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임을요.

 

그 애. 정 씨 아저씨의 아들. 정공룡 세 글자. 분명 둥그런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그렇게도 나를 쿡쿡 찌르덥니다. 나와 엇비슷한 나이. 상반된 처지의 그 애.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고,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을 수 없던 그 애. 그 애가 눈에 자꾸만 밟혔어요. 무시해야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무시하고, 그저 외면하고, 그렇게 하루를 넘겨야 했는데. 빌어먹을 죄책감 때문에. 그때 입안에 남은 상처가 아직까지 낫지 않아서. 그때 먹은 사탕의 맛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그래서 그 애를 다그치지 못했어요. 원한다면 그 애를 배신자로 매도하여 사라지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조용히 문을 닫고 천천히 그 애에게 다가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무어라 해명해야 할까. 설령 비명이라도 지르면 어쩌나. 온갖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식은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목으로 떨어지더군요. 나는... 떨고 있었습니다. 두려웠어요. 아버지를 마주할 때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졌습니다. 그 애, 내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는 곧바로 다가오더군요. 발걸음 소리가 또렷했어요. 본능적으로 나는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등에 문이 부딪히고,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졌을 때 즈음. 

나도 데려가.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어요.

 

 

 

그 짧은 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요. 그저 다 알아차렸구나 하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휘젓더랍니다. 혼란스러웠어요. 그야 나는 항상 혼자였고 누군가와 함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그 애는 나의 반응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내 양팔을 붙잡은 채 한 번 더 말했어요. 같이 도망치자고. 이 지긋지긋한 종교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잿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버리고 온 기억은 어느새 다시 다가와 내 발목을 붙잡더군요. 아저씨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어요. 저 깊은 곳에서 아릿한 쓴맛이 올라왔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뿐이었고 그 애는 그제서야 나를 놔주었습니다. 내일 보자. 그 말만을 남긴 채 그 애는 떠났어요.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애의 손아귀에서 구겨져 버린 내 탈출 계획들이었지요. 그 애가 서 있던 자리를 나는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마법처럼 나는 또다시 살아나게 되었어요. 처음 꿈을 꾸게 된 그때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 애의 눈에서 갈망을 읽었어요. 잿빛으로 빛나는 것이 나를 휘감고 기어이 나를 살게 만들어서. 나는 벅차오르는 것에는 통 연이 없었고 그랬기에 그런 부류에는 한없이 나약했습니다. 그 애에게 휩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송두리째 흔들리는 삶. 범람하려 드는 것에 쉽게 유혹당해서. 그 날의 그 애는 뱀을 닮아 있었어요. 한 손에 선악과를 들고 다른 손에는 지도를 들고 나를 꼬드겼지요. 나는 무척이나 유약하여 쉽게 그 속삭임에 넘어가고, 아저씨를 생각하고 또 그 애를 생각했습니다. 죄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밤을 새워본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가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겼어요.

 

아버지는 내가 다른 신도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지요. 그렇기에 난 정공룡을 대리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나를 그 애와 떼어놓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다음 날 나는 다짜고짜 그 애에게 그 말을 했어요. 그 애는 당연히도 꺼렸습니다. 날 죽이려는 거냐 뭐냐 하며 별 난리를 피웠는데. 솔직히 말해보자면 그때 정말 죽일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전날 밤의 갈망에 어느 정도 휩쓸린 후였고, 그랬기에 그 애를 모함하는 대신 침착하게 머리통을 한 대 갈겼어요. 경쾌한 소리가 기도실 안을 채웠습니다. 그 애, 맞고 나서는 금세 조용해지더군요. 다만 한 시간가량을 억울한 눈초리를 하고선 날 째려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아랑곳 않고 나는 그 애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했어요. 물론 내가 한 짓은 빼고 말이에요. 아직까지 나는 내 죄를 떳떳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 애에게 내 밑바닥까지 꺼내 보이기에는... 나는 아직 그 애가 지을 표정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차마 고하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이야기에 빈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그 애는 입을 다물더군요. 그 애, 확실히 눈치가 빨랐어요. 머리도 나름대로 잘 돌아갔고요. 아버지가 위협으로 느낄 것이 확실했습니다. 맹추 같은 놈이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어느 정도의 대화를 끝내고 나서는 바로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도 기억하실 테지요. 나는 목사실 문을 열고 침착하게 한 발을 내딛으며 말했었습니다. 대리인이 될 사람을 찾았다고 말이에요. 그 애를 꼬드길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었던가요. 당신은 내 말을 순순히 믿는 것 같았습니다. 여태 해왔던 노력의 결실이란 그런 걸까요. 아버지는 생각보다 나를 쉽게 놓아 주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장소에만 서 있으면, 기억하면 안 될 것까지 모조리 기억나곤 하였으니까요. 유년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를 이루는 것들이요. 내 삶의 대부분은 아버지와 맞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행해지던 모든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었지 과거 따위에 억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어요. 목사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기도실로 뛰어갔습니다. 그 애가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요. 미래를 꿈꾸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기다려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질질 끌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끝마치고 실행에 옮겨야 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촉박하게 느껴졌어요. 하나였던 것은 둘이 되었고, 그만큼 수정하고 보완할 사항이 늘어났으니까요. 그럼에도 나를 덮쳐오는 긴장감은 기분이 나쁘거나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정도는 즐겁게 느껴지기까지 했어요. 산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인 걸까요. 아버지는 아버지를 살게 하는 그 종교를 보며 이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요.

 

그 애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지향점이 같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는 처음 알았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격까지 잘 맞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곧잘 의견이 엇갈렸고, 싸우는 대신 논리 없이 제 주장만 고집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아득바득 무언가를 이기려 들면 그 애는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봤는데, 그게 그렇게 즐겁더군요. 나는 내가 그렇게 주관이 뚜렷한지는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미친 짓을 할 수 있는지도 처음 알게 되었고요. 그 애와 있으면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요. 계획이 견고해질수록 그 애와 지내는 시간도 길어져 갔고,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 눈초리였습니다. 심지어는 내 방에 그 애가 머무는 것을 허락해주었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장소는 한층 더 넓어졌어요. 점점 실없는 이야기와 수많은 기대감이 우리의 사이를 채워 나갔습니다. 비지니스마냥 시작 되었던 관계는 어느새 진심이 되어 있었어요. 나는 더이상 외롭지 않았고, 곧 죽을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 애는 마치 신과 같았어요. 성경에 있었던 신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애는 나의 신이었어요. 어느 순간 나타나서는 내 비밀을 캐내더니, 그걸 다시 묻는 대신 나를 도와주는 나의 신. 나와 기꺼이 함께 해주는 그 애. 그 애와 함께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모든 게 순조로웠고요. 밤이 되면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 바깥에 대해 상상했어요. 어디로 갈 것이며,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온갖 사소한 것부터 커다란 것까지, 모든 것을 정해두고 또 변덕을 부려 금세 의견을 바꾸고. 결국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 이유는 없고, 그저 그 넓은 것을 직접 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누군가가 버려두고 간 책을 읽다가 문득 바다라는 게 궁금해졌거든요. 시퍼렇고 광활한 것. 직접 마주하면 누구라도 압도당할 법한 크기의 그것. 모두를 압도함에도 동시에 그것들을 포용하고 또 자유롭게 하는. 그곳에서 살고 싶어졌어요. 그 애도 동의하더군요. 탈출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맞아떨어지던 의견이었어요. 별 중요치 않은 것으로도 쉽게 갈리던 것이 우리였는데, 오히려 도망의 종착지를 정하는 것은 수월했습니다. 내 주장에 따라 고양이를 키우기로 했고, 또 그 애 의견에 따라 한 마리만 키우기로 했습니다. 한 번 목적지가 정해지고 나니, 엇갈리던 모든 것들도 맞물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더이상 갈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당연히 이루어질 것들이었고, 우리는 그때를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무언가를 기다린 것이 그렇게 아늑하게 느껴질 줄은 추호에도 몰랐는데. 나는 급속도로 안정을 찾아갔어요. 평화로운 날들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애가 있는 이상 나는 대리인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이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지 않아도 되었으며 밤에 들리는 목소리를 늘리게 되는 일도 없어졌어요. 점점 악몽을 꾸고 환청을 듣는 횟수도 줄어들고, 입안의 상처도 아물어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말 실행뿐이게 되었을 그 무렵, 그때 즈음의 나는 그 애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어요. 그랬기에 나는... 기어이 내가 참아오던 짓을 저질러버렸습니다. 평생을 살며 계속해서 되새겨오던 말들. 정을 주지 말라. 날 여기까지 살 수 있게 해왔던 그것을 결국에는 어겨 버렸어요. 그 애에게 정이 가더군요. 사람 마음이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그 당사자가 내가 된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어차피 그 애는 신이었으니까. 나의 신이니까 정 따위에도 아스러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불안해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사실 내가 받아들이기 한참 전부터 그 애에게 정을 주고 있었으니까요. 모든 미래에는 그 애와 내가 함께했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나요. 불가피한 것이었어요. 유혹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에게는 선택권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거예요. 평소에는 끔찍하게 여겨지던 그것이 그때만큼은 그닥 불쾌하지 않았던 건 어떤 연유였을까요. 나는 아직까지도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평화. 자그마치 십 구 년을 살아오며 처음 느껴본 것. 내 청춘의 끝을 그 애와 함께할 수 있던 것은 정말 행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음울한 삶에서 나를 구원해주었으니까요. 나는 그 애를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애 역시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고 있어요. 그야 우리는 항상 함께 했으니까요. 그러나 믿음이 과하면 독이 된다고 하지요. 예기치 못한 시련은 순식간에 우리를 짓밟곤 합니다. 언제였던가요. 계획했던 실행일로부터 일주일 전쯤의 일이던가요. 그날 따라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곤 했습니다. 그 애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나는 손이 미끄러져 식판을 엎었지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평소처럼 서로를 놀려먹곤 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유 모를 불안감은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문득 계획을 재정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고 신도들이 잠드노라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종이 여러 장을 펼쳐두고선 언쟁을 벌였습니다. 다만 유난히 사소한 부분에서 의견이 맞지 않았고, 유난히 목소리가 커졌으며, 그랬기에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해서.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그 뒤에 서 있는 아버지. 마구잡이로 바닥에 펼쳐져 있는 종이. 그 애와 나. 눈이 마주치는 둘. 잿빛의 눈동자. 그 속의 선연한 공포. 그날처럼. 마치 그날처럼.

 

아버지는 무슨 연유로 이 방에 들어왔던 건가요. 나를 의심하던 눈치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그날따라 잠이 안 왔던 것뿐이겠지요. 그랬기에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볼 셈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고, 우연히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걸은 것이고. 그렇게, 그렇게 우연히... 

몇 초간의 정적. 그때는 정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습니다. 꿈이라는 생각도 잠시 해봤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움직이고,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야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나간 이후에도 우리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어요. 얼어붙은 공간.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애였습니다. 문에 잠금 장치 따위가 있을 리는 만무했으니, 의자 따위를 움직여 문을 봉쇄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온몸을 한없이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오지 않는 숨을 억지로라도 내쉬었어요. 의식적으로 호흡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거든요.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그 감정에 나는 쉽게 잡혀먹힐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 그 애가 곁에 없었더라면 실제로 그랬겠지요. 그새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그 애가 나에게 오더군요. 내 두 손을 붙잡고 나를 위로하덥니다. 막상 자기도 떨고 있었으면서 그랬어요. 참 신기한 일이지요. 멈출 줄을 모르고 한없이 떨리던 것이, 그 애에게 닿자마자 금세 멎어 들어갔습니다. 막연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순간마저도 나는 그 애를 믿고 있었으니까요. 정확히는 나와 그 애는 언제나 함께하리라는 것을요. 그렇기에 아버지조차도 이것을 거역할 수는 없으리라 믿었어요. 그러나 쿵쿵 문을 울리는 두어 번의 발길질 소리. 그 이후 점잖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나는 그 믿음이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쉽게 깨닫고 맙니다. 아버지. 내 의지도 아닌데 나는 자연스레 당신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애는 불안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달리 나를 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애도 여전히 나를 믿고 있던 겁니다. 빌어먹게도 신뢰는 한없이 견고했고, 도통 깨질 생각을 않았지요. 저 문 너머로 당신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유년기로 돌아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문을 열라는 그 목소리에, 나는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내가 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사람들을 시켜 문을 부술 것이었고, 그것은 아버지의 화를 돋우고 내 공간을 파괴할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그 애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문으로 향해 의자를 빼냈어요. 몇 번의 심호흡. 나는 달달거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고, 내가 힘을 주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문을 열어버렸지요. 나는 못이 박힌 듯 서 있었습니다. 실망이구나. 아버지의 그 한 마디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어요. 곧이어 신도들이 들이닥치고 그 애는 끌려나갔지요. 반항을 하지 않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끌려나갔지요. 뭐라고 했던가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었나요. 아니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었나요. 그마저도 꼭 그 애 같아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지 못해 웃었어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요. 그 누구도 이런 나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조차 그때만큼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었죠. 서서히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아버지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된 방안은 순식간에 싸늘해졌습니다. 나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시선. 나는 지지 않고 당신을 노려보았지요. 마치 그 애처럼 말이에요. 아버지는 별말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라고 하셨던가요.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니, 라고 했던가요. 나는 그 말이 사무치게 증오스러웠고, 그럼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침묵하는 나를 내버려둔 채로 아버지마저 내 방에서 떠나갔어요. 그리고 나는 말 그대로,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나의 방. 고독은 때를 놓치지 않고 나를 파고들덥니다.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었어요. 목을 타고 비명이 흘러나왔습니다. 구태여 막으려 들지는 않았어요. 아무리 내지르더라도 찾아오는 이는 없었으니까요.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어요. 더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쯤엔 그저 바닥에 드러누워 한참을 웃었습니다. 얼굴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덥니다. 나는 감정을 배운 적이 드물었고, 그렇기에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아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습니다. 알고 나서는 더 크게 웃었어요. 그렇지 않고선 정말 못 버틸 것 같았으니까요. 온 얼굴이 짠 것으로 물들었습니다.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말이에요. 바닷물이 짠맛이라고 그랬던가요. 이런 때까지도 그딴 생각이 들덥니다.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바다에 그 애는 함께하지 않았다는 걸요. 눈물이 직직 흘러나왔습니다. 한 번 터진 것은 끝날 생각을 않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 애는 나에게 터뜨리는 법만을 알려주고 멈추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연스레 멎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정을 준 것을 후회하면서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런 말들을 곱씹고 있노라면 내 앞에 떠오르던 기억은 예상과는 다른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그 애에게 못되게 굴었던 때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일부러 골려 먹던 날들. 나는 그 애와 친해진 것을 후회해야 했는데, 어째서 그 애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던 걸까요. 나는, 나는 대체 무엇에 홀려버린 걸까요. 내가 먹은 선악과는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요.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며, 그렇기에 나는 그저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어요.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멈추고 나서 예상대로 나는 차분해졌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태초부터 나의 운명으로 정해져 있던 것. 내가 원래 택해야 했던 길. 신. 신이 되는 것 말이에요. 내가 신이 되면 모든 게 끝날 일이었습니다. 대리인은 이미 충분했고, 더는 누군가를 대체품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깟 두려움이 뭐라고 나는 이 쉬운 것을 외면하고 살았던 걸까요. 기생하는 삶은 그만두려고 합니다. 나는 오롯이 신이 되어 자존할 것이었어요. 신이 되어 이 모든 속박을 끊고. 내 모든 죄악을 품어 내고. 나로 인해 희생당한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결국에는 그 애를. 정공룡 그 애를 살려낼 것이었습니다. 

 

 

 

결심이 끝나면 그 외의 것들은 빠르게 이루어지덥니다. 어지럽혀진 방을 정돈하고 책상 앞에 앉아 종이 한 장을 꺼냈어요. 신이 되기 전 그 애에게 내 치부를 고해해야 했으니까요. 종이 한 장. 그 허연 것에 교차하는 수많은 감정. 나는 지금처럼 펜을 들고 내 모든 죄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한참 터무니없는 짓이었지만요. 남에게 쓰는 자백의 말들은 처음 전하는 것이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새어 나오더군요.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것들. 그만큼 쌓아왔던 게 많았던 탓일까요. 아니면 나 스스로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던 탓에 그런 것일까요. 편지에는 내가 적어둔 모든 만행을 기록해놨습니다. 그 아저씨 이야기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무의식적으로 나는 입속의 여린 살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아물었던 상처 부위에서는 다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비릿한 것이 내 입안을 가득 채우덥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썼어요. 내 모든 죄를 수많은 글자에 새기고서는, 그제서야 잠시 망설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도 죽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으니까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인간이었고, 사망에 대한 공포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나는 써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걸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내가 신이 되겠다고 적었어요. 난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그 애는 나와 달리 혼자서도 곧잘 해내곤 했으니까요.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나를 이곳에 버려두고선 말입니다.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멈출 생각을 않덥니다. 그 애가 없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내 길은 이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고. 나는 신이 될 것이라고. 신이 되고 싶다고. 혼자 도망치라고 했어요. 나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탑의 꼭대기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싶다고. 그들의 신이 되어 그 위에서 군림할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절대 죽을 일이 없으니, 내 걱정은 말고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나와 함께 하려들지 말라고. 오히려 나는 도망치기 싫어졌다고. 도망이고 뭐고 지긋지긋하다고 했어요. 아니, 사실 처음부터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썼던가요. 내가 한 것은 그저 목사의 아들로서 배신자를 가려내기 위함이었고 너는 보기좋게 내 함정에 걸린 거라고. 그간 지내온 정이 있어 아직 모든 걸 털어놓지는 않았으니 그 사이에 도망치라고. 그 애가 이 말을 믿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뒤로 갈수록 허무맹랑한 말들 뿐이었고 심지어는 문맥조차 맞지 않는 게 허다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이 편지의 위쪽에 이미 내 추악한 기억들을 모두 기록해두었고, 그것은 그 애의 믿음을 변질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뒷부분의 이야기는, 그저 그 애에게 구실을 만들어 준 것뿐이었어요. 나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과거에 허덕이다 못해 잠식당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저 합리화를 대신 해주는 것뿐이었죠.

 

편지를 마무리하고는 두 번 반으로 접었습니다. 허연 부분 위로 울룩불룩하게 글씨가 튀어나와 있었어요. 그 부분을 잠시동안 매만지다가, 이내 정공룡 이름 석 자를 적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적어놓지 않았어요. 구태여 추가하지 않아도 그 애라면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까요.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때는 이른 아침이 되어있덥니다. 신도들은 죄 자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고, 숨 막히는 정적만이 나를 반겨 주었어요. 나는 망설임 없이 기도실로 향했습니다. 맨 마지막 칸. 우리가 항상 함께했던 그곳에 편지를 올려두고 주저 없이 발을 옮겼지요. 종착지는 목사실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그곳에 앉아 있었고, 별 말 없이 들어오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던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도 내 행동을 예상했었던 것이겠지요. 나는 아버지께 다가갔어요. 이번만큼은 손끝마저도 떨리지 않더군요. 한 자 한 자 담담하게 내 의사를 내뱉었습니다. 간밤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요. 드디어 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입니다. 그 애가 아닌 내가 갈 차례라고. 더이상의 대리인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신이 되어 그 고양감을 누릴 준비가 되었다고 말이에요. 내 입으로 내리는 나의 사형 선고.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덥니다. 그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대신 그 애를 보내달라고 했었지요. 도망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신이 되는 게 아니더라도 뭐든 좋으니, 그 애를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말이에요. 그 때 아버지는 무슨 표정을 지었던가요. 날 측은하게 봤던가요. 아니면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던가요. 아버지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도저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내가 지지 않고 응수했던 것만큼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지요. 나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아버지와 똑같은 샛노란 눈동자를 하고 당신을 노려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마 내가 그렇게 살아있는 눈을 하던 것은 처음 봤을 겁니다. 그야 아버지 앞에서는 곧잘 내비칠 일이 없던 걸요. 어쨌든, 아버지는 웬일인지 내 요구를 받아들여 주셨지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밖으로 나가덥니다. 아마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색색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그제서야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 애가 날 보며 서 있더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요. 군데군데 작은 상처가 보여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그 애는 머쓱하게 웃으며 상처를 가리기에 급급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전날과 같은 미묘한 정적. 다만 훨씬 부드럽게 느껴지던 것.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듯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분위기를 깨덥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그 애는 아마 그 상태 그대로 풀려났겠지요. 

 

나는 그대로 내 방에 갇히고, 갈 곳이 없어진 그 애는 아마 기도실로 향했을 겁니다. 그 애가 갈 수 있던 유일한 곳은 그곳 하나뿐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요. 내가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그 때, 그 애는 내 편지를 발견했을 겁니다. 새겨진 모든 것을 읽어내고서는 나를 원망하려 들겠지요. 모든 게 예상이 가덥니다. 정말 신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랬기에 더더욱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런 저를 알았기에 경비를 허술히 한 것이겠지요. 아버지가 저를 고의로 놓아줄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놓아줬더라도 어차피 도망칠 생각은 않았을 테지만요. 저는 지쳐있었습니다. 이제는 지긋지긋했어요. 삶이라는 것도. 종교라는 것도. 날 위한 명목 하에 해오던 모든 일도. 살기 위해 내가 저질러온 온갖 만행들도. 죄책감도. 죄악도. 악몽도. 환각도. 나를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모든 것들이. 나는 그저 이따위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본능적인 회피. 그게 아니라면 망각에 대한 뱃심. 어쩌면 천성이 이런 사람이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애와 어울리고 나서는 나도 잊고 있었던 내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거든요. 고집이라든지 오기라든지 쓸데없는 반항심이라든지. 죄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는데 나는 그마저도 좋았습니다. 내가 나처럼 느껴져서 좋았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팔아넘겨 살아남는 자리라니요. 이대로 버티다간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학교는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모든 교육을 당신 밑에서 받았으니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점점 모든 것이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완전히 동기화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 애 덕분일 겁니다. 그야 나를 처음 살게 한 것은 아버지였지만, 두 번째로 내게 삶을 선사한 것은 그 애였으니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그 애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나는 책상 위에 가만히 앉아 그 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늘을 향해 빌어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지요. 깍지낀 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서는 중얼거리며 신을 찾았어요. 아마 지금쯤 그 애는 이곳에서 벗어났을 겁니다. 그러니 신님. 만약 정말로 실존한다면 부디 그 애의 무운을 빌어주세요. 내가 뱉은 그 말은, 사이비의 신을 부르는 것치고는 꽤나 독실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있었다면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나 빌어먹게도 내 예상대로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도에 대한 응답 대신 벌컥 열리는 문소리가 나에게 전해지덥니다. 나는, 나는 그제서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심판의 시간이 그리 일찍 다가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먹에 꽈악 힘을 주어봐도 떨림은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는,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또 아저씨의 눈빛을 떠올리고.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고. 사탕의 맛을 기억하고. 입안의 상처를 혀로 더듬고.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 역시도 그에 맞추어 뒤를 돌아봤습니다. 

돌아봤는데,

 

예상 외의 인물이 그 앞에 서 있었어요. 

 

 

그 애. 그 애가 왔어요. 당연히 도망갔으리라 생각했던 그 애가. 잿빛 눈동자가 나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어요. 땀에 젖어 축축해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다음으로는 잿빛 눈동자가 들어왔고. 나는 원래대로 그 애에게 욕을 퍼부을 계획이었어요. 꺼지라고 온갖 난리를 치면서 말이에요. 평소 해오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애를 보내면, 그대로 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애를 보자마자 나는 살고 싶어졌어요. 나를 이루던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갈망만이 그 자리를 채웠어요. 살고 싶어졌어요.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요. 바닷물의 짠 내가 궁금해졌고,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결이 궁금해졌어요. 꿈을 꾸고 싶었어요. 다시... 다시 살고 싶어졌습니다. 마치 마법처럼 말이에요. 그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하게 됐다고요. 빌어먹을 인생. 이렇게 빌어만 먹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상 어떤 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답니까. 설령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이 싫었지만 시커먼 밤은 더더욱 싫었어요. 범람하는 어둠이 꼭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자고 일어나면 옆에 누워 있던 친우는 사라져 있고, 그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아요. 나 역시도 그를 찾으면 안 됐어요. 나는 신이 될 사람이었으니까요. 신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설령 그것이 내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끝없이 무시하면 잊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둘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방관하고 무시하며 보냈습니다. 달 밑에서는 눈과 귀를 막았고 해 밑에서는 떠오르는 기억을 억눌렀어요. 더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이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마따나 날 대신해서 떠난 그 아이들이 신이 됐다면, 신은 못되더라도 대리인이 됐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거나 벌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멀쩡하고, 그렇기에 아버지의 모든 것은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숨기고 살던 것은 생각보다 쉽게 드러납니다. 허무하리만치요. 이제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이 그 증좌가 됩니다. 아마 내 죽음까지 그것은 날 쫓아올 테지요. 마치 저주처럼 말이에요. 이제 그따위 저주 같은 건 그만 받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만둘 겁니다. 존재를 부정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이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까요. 세뇌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고, 그렇기에 나는 신이 아닌 내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 방식대로 신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신이 아닌. 신도들의 신이 아닌. 그 애의 신이 되겠습니다.

 

아버지. 나는 신이 될 겁니다. 모든 걸 방관하는 저 위의 신이 아닌, 사람 속에 섞여 존재하는 신 말입니다. 그렇게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애가 나를 그렇게 불렀으니까요. 날더러 신이랍니다. 차라리 신이 되라고 하덥니다. 죽지만 말라고 나를 붙잡는 그 애를 내가 어찌 떨쳐낼 수 있을까요. 내가 살았으면 좋겠대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대요. 정말로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대요. 같이 바다를 보고 싶대요. 아버지에 대한 속죄는, 다른 이들에 대한 속죄는 살아서도 할 수 있대요. 그 애가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신이 되도록. 군림하는 신이 아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어우르는 신이 되도록 말이에요. 나는 아직도 그 애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합니다. 나를 각별님이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내 손을 붙잡으며 애걸하던 그 얼굴이. 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내 이름이 그렇게 둥글게 발음 되는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야 내가 아버지와 신도들에게 받아왔던 것은 항상 각지고 차가운 것들뿐이었으니까요. 내 이름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은 죄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으니까요. 각별님이라는 짧은 한 단어가 나에게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하덥디다. 나는 내 이름에 그렇게 많은 감정이 섞일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남에게 그런 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내가 하려던 모든 말들이 순식간에 증발했어요.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편지에 쓴 말, 그딴 건 진심이 아니었다고. 붙잡는 말도 밀어내는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나는 그 애를 쳐다보고, 그 애가 내민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뛰쳐나갔어요. 밖으로. 저 먼 바다를 향해서 말이에요. 나는 그 순간 고양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어요. 내 세계가 진동하는 게 좋았습니다. 태양은 우리 둘을 비추었고, 우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달렸어요. 마지막 계획대로 말입니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둘 뿐인 것처럼요. 나는 그 애에 의해 또 한 번 살아있음을 느끼고, 내 방식대로 신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범람하는 것. 나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것. 그 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짐작했던 그것. 재앙과도 같은 그것. 나의 모든 것은 그 애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거라고. 그리고 곧 흔들려 사그라지는 것 위로 새로운 꿈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저는 그 애와 이곳을 떠납니다. 저 멀리로 떠나 아득바득 살아남을 거예요. 저 먼 곳. 바다가 보이는 그곳. 그 누구도 우리를 찾지 못할 곳으로요. 과거도 종교도 아버지도 그 무엇도 없는 공간에서 그 애와 지낼 겁니다.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것 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순조로울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이 나이를 먹고도 바깥 생활을 해본 적은 하루도 되지 않으니 어쩌면 더더욱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떠나렵니다. 누군가의 발목을, 목숨을 붙잡고 하루하루 연명해나가는 삶은 그만두렵니다.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어쩌면 그 안정감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지도 모르죠. 나를 위협하는 곳에 안정감이라는 단어를 함께 두는 것이 웃기기도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그곳은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을 바친 곳이니까요. 그럼에도 나는 이곳을 버릴 겁니다. 과거를 떨쳐내는 것 대신 모두 끌어안은 채로 이곳을 떠날 겁니다. 더는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으로. 나를 범람한 짜디짠 바닷물이 있는 그곳으로. 미련 없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미 미래를 위해 계획해둔 것이 있으니까요. 나를 살게 만드는 갈망이 있으니까요. 나는 그 애와 함께 내 청춘의 끝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춘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 모든 것을 그 애와 함께하게 되겠지요.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될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나는 예견된 죽음으로 갑니다. 종교로부터 태어나 그것이 없는 곳에서 죽으렵니다.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 테지만 나는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야 나는 이제 외롭지 않으니까요. 그 애와 함께 넓은 바다를 보러 가겠습니다. 아버지 대신 많은 것을 보고 또 즐기다 가렵니다. 시퍼렇고 광활한 것. 직접 마주하면 누구라도 압도당할 법한 크기의 그것을요. 나를 압도함에도 동시에 포용하고 또 자유롭게 하는, 나의 바다. 나의 신과 함께. 정공룡 그 애와 함께. 우리는 떠납니다. 종교를 버리고 떠납니다. 바다를 향해. 갈망하던 것을 위하여. 우리는 예견된 죽음으로 갑니다.

 

밤이 될 즈음엔 바다에 도착할 겁니다. 쏟아지는 별빛과 이를 담는 밤의 바다. 나를 덮칠 듯 휘몰아쳐도 더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피하지 않을 겁니다. 두렵지 않으니까요. 어둠이 두렵지 않아요. 더이상 어둡게 느껴지지 않아요. 모든 것은 환히 빛내어 우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빌어먹을 나의 재앙. 그 애와 함께라면 밤도 낮과 같이 밝게 우리를 품어주덥니다.

돌아갈 생각은 추호에도 없습니다. 갈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요. 아마 아버지는 나를 쫓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살아서는 없을 테지요. 나중에 죽어서나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떨어지게 될 곳은 같을 터이니, 가능성이 낮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다면 아버지. 우리는 지옥에서나 봅시다. 나는 그곳에 떨어지기 전까지 회개하며 살 터이니,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종교를 위해 평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대리인이라는 명목하에 제물을 바치는 것은 그만두고, 정말 진실한 종교를 위해서 말입니다. 아비보다 지옥을 먼저 빠져나가는 불효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노력하며 살았으니 아버지도 나를 좀 도와주셔야지요. 더는 부끄럽게 살지 맙시다.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곧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이니까요.

 

모쪼록.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아버지에게. 

 

 

 

 

 

 

 

 

19xx년 8월 26일

am 05:14. J 군과 K 군 실종.

추적 불가능. 

...

가능한 한 실종자들을 언급하지 말 것.

 

 

 

 

우리는 예견된 죽음으로 갑니다.

W. 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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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오즈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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